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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경제

유럽 중화학 공업의 위기와 에너지 정책의 역설: 산업의 몰락인가 부활인가

 

유럽연합(EU)의 경제적 근간을 이루던 중화학 공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최근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유럽의 주요 산업계 수장들은 EU 지도부를 향해 에너지 비용 절감과 불공정 경쟁 방지를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미국과 중국과의 경제적 패권 다툼이 심화되는 가운데, 유럽의 산업 경쟁력 복원은 이제 단순한 경제적 이슈를 넘어 정치적 생존이 달린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이른바 '산업판 다보스 포럼'의 내용을 바탕으로 유럽 경제가 직면한 에너지 위기와 정책적 모순을 심층 분석해본다.

 

 

 

 

유럽 중화학 공업의 위기와 에너지 정책의 역설: 산업의 몰락인가 부활인가

 

 

 

에너지 비용의 폭주와 산업계의 절박한 외침

 

세계 최대 화학 기업인 BASF의 마르쿠스 카미에트 최고경영자(CEO)는 정상회담 개막식에서 "이제 진단의 시간은 끝났다"고 일갈했다. 그는 유럽이 계획에서 결과로, 의도에서 영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유럽 산업을 재부팅(Reboot)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난 2년 동안 에너지 비용 하향 조정과 친환경 규제 완화를 요구해온 산업계의 인내심이 바닥났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럽 철강 로비 단체인 유로퍼(Eurofer)의 악셀 에거트 사무총장은 전기 요금을 메가와트시(MWh)당 50유로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향후 10년 동안 산업의 녹색 전환을 이끌어갈 근간이 바로 전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독일의 내년도 전력 시장 가격은 MWh당 80유로를 웃돌고 있다. 산업계가 요구하는 '생존 가격'과 시장 가격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존재하는 셈이다. 유럽 산업계는 가스 가격이 전체 전기 요금을 결정하는 현재의 전력 시장 설계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친환경 정책의 덫과 자금 배분의 불균형

 

유럽 산업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탄소 배출권 경매를 통해 거둬들인 정부 수익의 배분 문제다. 이론적으로 이 수익은 중화학 공업의 탈탄소화를 돕는 데 다시 투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피 유럽(Sappi Europe)의 마르코 에이켈렌붐 CEO는 정부가 종종 다른 분야나 기술을 우선시한다고 지적했다. 친환경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그 정책을 수행해야 할 기간 산업이 고사 위기에 처한 역설적인 상황이다.

 

기업들은 더 높은 에너지 비용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시스템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강한 유럽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한 유럽 산업이 필수적인데, 현재의 정책 기조는 오히려 산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과 중국이 자국 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는 동안, 유럽은 규제의 늪과 고비용 구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가스 포기와 에너지 안보의 딜레마

 

유럽 경제의 위기를 진단하는 시각 중에는 다소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관점도 존재한다. 유럽이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하기로 한 결정이 스스로의 발등이 아닌 머리를 쏜 격이라는 지적이다. 저렴한 에너지 공급원이 사라지면서 유럽의 산업 경쟁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반면 미국은 유럽에 훨씬 비싼 가격으로 가스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유럽은 이 '딜'을 거부할 권리조차 없이 수용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저렴한 에너지는 유럽 중공업을 지탱하던 핵심 엔진이었다. 이 엔진이 멈춰 서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제조업 중심 국가들은 역성장의 공포에 떨고 있다. 저렴한 러시아 가스 대신 비싼 미국산 LNG(액화천연가스)를 수입하면서 발생하는 추가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과 소비자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이는 결국 유럽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진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유럽 산업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중국의 공격적인 보조금 정책 사이에서 유럽은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미국의 저렴한 에너지와 파격적인 세제 혜택은 유럽 기업들의 탈유럽화를 부추기고 있다. 실제로 많은 유럽 화학 및 철강 기업들이 신규 공장 부지로 유럽 대신 미국을 택하고 있다. 생산 기지가 떠나면 일자리가 줄어들고, 이는 다시 세수 감소와 경제 침체라는 악순환으로 연결된다.

 

중국 역시 문제다. 중국은 정부 주도의 막대한 지원을 바탕으로 저가 공세를 펼치며 유럽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유럽 산업계 수장들이 '불공정 경쟁'으로부터 지역 산업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유무역을 신봉하던 유럽이 이제는 생존을 위해 보호무역의 장벽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유럽 산업의 재부팅을 위한 과제와 전망

 

유럽이 다시 강력한 산업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단순히 친환경 구호를 외치는 것을 넘어, 기업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에너지 비용 절감책이 나와야 한다. 가스 가격과 전기 요금을 분리하는 전력 시장 개혁은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또한 탈탄소화를 위한 자금 지원이 적재적소에 배분되어 중화학 공업의 체질 개선을 도와야 한다.

 

안트베르펜 선언에서 산업계 대표들이 강조했듯, "강한 유럽 산업 없이는 회복력도, 안전도, 강한 유럽도 없다." 지정학적 위기를 기회로 삼아 투자 장벽을 허물고 단일 시장을 강화하는 과감한 결단이 요구된다. 만약 이번 기회마저 놓친다면 유럽은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는 '산업 박물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결국 유럽의 미래는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 사이의 균형점을 어떻게 찾느냐에 달려 있다. 탄소 중립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산업의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정교한 정책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다. 유럽 지도부가 산업계의 이 절박한 외침에 어떻게 응답할지가 향후 수십 년간의 유럽 경제 지형을 결정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