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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대영제국의 환상과 중권 국가의 현실 : 영국 정치권이 숨기는 불편한 진실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최근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키어 스타머 총리와 노동당 정부가 아무리 정치를 완벽하게 잘했더라도, 현재 불어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란 사이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가격 폭등과 공급망 붕괴는 영국의 통제 범위를 한참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 정치인들은 여전히 국민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오늘은 영국의 현재 주소와 그들이 직면한 '중권 국가(Middle Power)'로서의 냉혹한 현실을 파헤쳐 본다.

 

노동당 정부가 완벽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잠시 상상을 해보자. 키어 스타머의 노동당 정부가 집권 이후 지난 19개월 동안 모든 정책을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공공 재정을 수리하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주장하는 성과가 겸손하게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트럼프의 이란 전쟁이 가져온 경제적 후폭풍 앞에서 영국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대영제국의 환상과 중권 국가의 현실: 영국 정치권이 숨기는 불편한 진실
Pic.: NYT

 

 

 

이것은 단순히 노동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당의 리시 수낵 전 총리가 완벽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운명을 바꾸려면 금융 위기 이전부터 에너지 정책을 완전히 뜯어고친 '가상의 정부'가 수십 년간 이어졌어야 가능했을 일이다. 냉정한 사실은 영국이 이제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슈퍼파워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취약한 중권 국가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영국 정부는 거대 강대국들이 일으키는 풍파를 멈추거나, 형태를 바꾸거나, 심지어 완화하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중권 국가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영국 정치인들의 오만

 

영국 정치인들의 공통점은 영국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영향력이 제한적인 중권 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인정하더라도 국민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강대국들이 일으키는 위기를 견뎌내려면 수십 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의 역할을 솔직하게 논의하지 못하다 보니 유럽연합(EU)과의 관계 설정에서도 실책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나 히트펌프 도입 같은 장기적인 국가 프로젝트에 대해 국민적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이 "우리는 여전히 강하다"는 허풍 섞인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동안, 정작 위기에 대비할 실질적인 인프라 구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정치는 결국 대중의 눈높이를 왜곡하고 장기적인 국력 소모를 초래할 뿐이다.

 

 

 

대영제국의 환상과 중권 국가의 현실 : 영국 정치권이 숨기는 불편한 진실

 

 

 

초강대국에서 금융 서비스 대국으로 그리고 다시 위기로

 

영국은 과거 전 세계를 호령하던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다 경제 위기를 겪었지만, 대처 혁명을 통해 '금융 서비스 슈퍼파워'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덕분에 오랫동안 영국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세계 역사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중권 국가의 지도자가 아닌, 세계의 설계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익숙해졌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글로벌 환경은 더 이상 영국에 우호적이지 않다.

 

지금 영국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태도 때문에 야당은 터무니없는 정책을 내놓고, 정부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낙관주의적인 성명만 발표한다. 국민은 고물가와 에너지 위기로 고통받고 있는데, 정치권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취해 현실 세계의 문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영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실제 비중에 대해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야기해야 할 때다.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책이 부르는 비극

 

영국 정치권이 중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수용하지 못하면 정책의 비효율성은 계속될 것이다. 에너지 안보나 국방 정책 역시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하는 전략이 아닌, 주도권을 쥐려는 헛된 망상에 기반하게 된다. 강대국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기르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지지율을 위해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정치는 위험하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경고처럼 영국 정치인들은 현실 세계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들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리고 국민이 견뎌야 할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솔직하게 소통해야 한다. 중권 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새로운 생존 전략을 짜기 위한 첫걸음이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뒤로하고 냉혹한 현실의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정직한 태도가 절실하다.

 

결론: 영국이 가야 할 새로운 생존의 길

 

영국은 여전히 중요한 국가이지만, 전능한 국가는 아니다. 트럼프와 이란의 전쟁 같은 외부 변수는 영국이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허울 좋은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자원 확보와 동맹 강화, 그리고 에너지 자립 같은 기초 체력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어린아이 취급하며 달콤한 거짓말만 늘어놓는다면 영국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키어 스타머 정부가 성공하려면 먼저 "우리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고백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한계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을 펴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중권 국가로서의 영리한 외교와 실용적인 내치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영국은 거대 권력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대영제국의 유령에서 벗어나 현실의 영국을 마주할 시간이다.

 

 

#영국 #노동당 #스타머 #경제위기 #에너지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