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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유럽 쇠퇴론의 핵심은 ‘가난’이 아니라 ‘의존’이다: 관광지화 담론을 데이터로 분해한다

 

 

‘유럽은 관광객을 상대하는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될 것’이라는 문장은 자극적이다. 뉴욕타임스(NYT) 칼럼이 던진 이 문제제기는 쉽게 공유되고, 쉽게 소비되지만 이런 문장이 위험한 이유도 똑같이 분명하다. 진단이 과장되면 처방도 과격해지는데, 유럽 내부에서 극우는 장벽을, 중도는 재무장과 기술 만능을, 좌파는 체념 또는 반(反)EU로 기울기 쉽고, 그 결과, 유럽의 문제를 고치는 정책은 나오지 않고, 유럽의 분열만 강화된다.

 

그래서 이 글은 ‘유럽 쇠퇴’라는 인상비평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 대신 세 가지 질문으로 분해한다. 첫째, 유럽 성장(성장률과 잠재성장) 둔화는 실제로 어느 정도인가. 둘째, 유럽이 말하는 ‘전략적 자율성’이 왜 번번이 흔들리는가. 셋째, 쇠퇴론이 진짜 위험한 지점은 어디인가.

 

결론을 미리 말하면 유럽의 가장 큰 취약점은 ‘가난’이 아니라 ‘의존’이며, 유럽은 여러 층위에서 의존을 누적시켜 왔으며, 기술도 의존, 핵심원자재도 의존, 안보도 의존이다. 그리고 이 의존 구조가 유럽의 성장과 정책 선택지를 동시에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유럽 쇠퇴론의 핵심은 ‘가난’이 아니라 ‘의존’

 

유럽 성장 둔화는 “0에 수렴”이라기보다 “낮은 평형”에 가깝다

 

NYT 칼럼은 유럽 성장의 무기력을 강하게 묘사하지만, 숫자는 조금 더 냉정하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2025년 가을 경제전망은 EU 실질 GDP 성장률을 2025년 1.4%, 2026년 1.4%로 제시하고, 유로존도 2025년 1.3%, 2026년 1.2%로 비슷한 흐름이다. “거의 0”이라고 단정할 수준은 아니나 동시에 이 숫자가 야심차지도 않다는 점이 더 중요한데, 잠재성장률이 내려앉는다는 진단이 함께 붙기 때문이다. 성장의 ‘낮은 평형’이 구조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독일은 더 상징적인데, 독일이 흔들리면 유럽 전체의 심리가 흔들린다.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Bundesbank)는 2025~2026년의 회복이 “완만하다”는 취지의 전망을 내놓았고, 2026년 성장률을 0.6% 수준으로 제시했다는 보도도 있는데, 이는 독일 경제가 다년간의 침체 이후에도 빠르게 튀지 못한다는 신호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유럽 성장의 문제는 단순한 경기순환이 아니라, 산업·기술·인구 구조가 엮인 장기 변수이며, 그래서 ‘단기 부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이 공공투자와 산업정책을 말하지만, 동시에 재정 규칙과 정치 분열 때문에 실제 집행이 느린데,  유럽은 늘 “해야 한다”는 말은 빠르지만, “할 수 있다”는 제도는 느리다는 말이다.

 

유럽의 진짜 취약점: 기술 의존과 원자재 의존이 동시에 쌓인다

 

유럽 쇠퇴론의 핵심을 GDP 비교로만 잡으면 오류가 난다. 진짜 핵심은 의존으로, 유럽은 기술에서 의존을 누적해 왔고, 공급망에서도 의존을 누적해 왔고, 이 두 가지 의존은 서로를 강화한다.

 

기술 의존의 대표 사례는 클라우드다. EUISS(유럽연합안보연구소) 분석은 2024년 유럽 클라우드 시장에서 미국 3대 하이퍼스케일러가 “거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유럽 사업자 점유율은 2017년 22%에서 2024년 15%로 낮아졌다고 정리한다. 이건 단순한 민간 시장 점유율 싸움이 아니라 데이터·보안·규제 집행력이 기술 스택에 묶인 것으로 유럽이 디지털 주권을 말할수록, 현실은 ‘미국 기술 의존’으로 정리된다. 의존, 의존, 의존. 이 단어를 유럽이 피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원자재 의존은 더 날것인데, 유럽연합 집행위의 Critical Raw Materials Act 설명 페이지는 EU가 핵심원자재를 제3국에 크게 의존하며, 예컨대 EU의 마그네슘 공급의 97%가 중국에서 온다고 제시한다. 공급망이 흔들리면 제조업이 흔들리고, 제조업이 흔들리면 성장도 흔들려  결국 유럽의 성장 문제는 원자재 의존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다. 

 

Eurostat(유럽통계청)도 2024년 EU가 마그네슘과 갈륨 같은 품목에서 중국 의존이 크고, 희토류(rare earth elements) 수입도 중국이 핵심 공급원이라는 점을 통계 해설로 보여준다. 이건 “중국과 거래하지 말자”는 감정적 결론으로 가면 안 되며, 오히려 유럽이 감당해야 할 현실은 “중국과 거래하되, 의존을 낮추는 비용을 누가 낼 것인가”다. 의존을 줄이려면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고, 그 투자와 시간이 곧 유럽의 정치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 

 

“쇠퇴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 잘못된 처방이 더 큰 쇠퇴를 만든다

 

NYT 칼럼은 유럽이 ‘쇠퇴를 직면하는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의식은 유효한데, 유럽이 “나는 여전히 중심이다”라는 착각을 버리지 못하면, 정책은 늘 과대망상과 과소집행 사이를 오간다. 다만 ‘쇠퇴를 인정하자’가 곧 ‘체념하자’는 뜻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인데, 쇠퇴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는, 잘못된 처방이 쇠퇴를 가속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잘못된 처방은 장벽이다. 이민·난민 문제를 ‘인종의 봉쇄’로 푸는 순간, 유럽은 인구·노동시장의 활력을 더 잃을 수 있다. 둘째는 기술 만능이다. “기술만 하면 된다”는 말은 듣기 좋지만, 기술의 기반이 클라우드·칩·데이터 인프라 의존이라면 결과는 ‘의존의 고도화’가 된다. 셋째는 재무장만능이다. 방산 지출을 늘리되, 장비와 에너지와 기술을 더 많이 외부에서 사오면, 유럽 산업은 세계 선도와 거리가 더 멀어지는데, 이때 유럽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의존을 확대하면서 안보비용을 지불하는 구조에 빠진다.

 

그래서 핵심은 “무엇을 더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의존을 줄일 것인가”다. 유럽은 선택해야 하고, 미국 기술 의존을 줄이려면 유럽 내부 생태계에 돈을 써야 한다. 중국 원자재 의존을 줄이려면 채굴·정제·재활용과 전략 비축을 설계해야 하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재정과 규제와 정치적 정당성을 요구한다. 결국 유럽의 쇠퇴론은 ‘경제 담론’이 아니라 ‘거버넌스 담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유럽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중간권(mid-table) 안정’의 조건

 

유럽이 다시 “세계 1등”을 꿈꾸는 순간 정책은 과장괴소, 반대로 “어차피 끝났다”로 가면 정책은 방기된다. 현실적인 목표는 ‘중간권 안정’으로, 유럽이 산업 기반과 복지국가와 외교 자율성을 일정 수준 유지하며, 기후·안보·무역에서 예측 가능한 행위자로 남는 것. 이 목표는 충분히 의미 있다. 그리고 이 목표를 위해 필요한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공공투자다. 재정 규칙을 경직적으로 적용해 성장을 더 누르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둘째, 통합된 산업정책이다. 국가별 파편화로는 미국의 기술 스택과 중국의 공급망에 맞서기 어렵다. 셋째, 의존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외교다. 모든 의존을 한 번에 끊을 수는 없다. 의존을 끊겠다는 선언보다, 어떤 의존을 먼저 낮출지 합의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그래서 더 중요하다.

 

결국 유럽 쇠퇴론은 “유럽이 끝났다”가 아니라 “유럽은 의존을 관리하지 못하면 더 약해진다”로 읽어야 한다. 유럽이 관광지로만 남는 미래는 예정돼 있지 않지만 의존을 방치하면, 그 미래가 점점 ‘가장 값싼 경로’가 된다. 유럽의 선택지는 아직 남아 있다. 다만 선택의 비용도 이미 커졌다. 이게 지금 유럽이 직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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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European Commission, Autumn 2025 Economic Forecast: EU 성장률(2025~2027) 전망
    https://economy-finance.ec.europa.eu/economic-forecast-and-surveys/economic-forecasts/autumn-2025-economic-forecast-shows-continued-growth-despite-challenging-environment_en
  • Bundesbank 전망 관련 보도(독일 경기 회복이 2026년까지 완만하다는 평가)
    https://www.reuters.com/world/europe/german-economic-recovery-get-subdued-start-next-year-bundesbank-says-2025-12-19/
  • European Commission, Critical Raw Materials Act(마그네슘 등 중국 의존 지표 포함)
    https://commission.europa.eu/topics/competitiveness/green-deal-industrial-plan/european-critical-raw-materials-act_en
  • Eurostat, International trade in critical raw materials(희토류·마그네슘·갈륨 등 수입 의존 통계 해설)
    https://ec.europa.eu/eurostat/statistics-explained/index.php?title=International_trade_in_critical_raw_materials
  • EUISS, cloud 시장에서 미국 하이퍼스케일러 비중(2024년 거의 3분의 2) 및 유럽 사업자 점유율 하락 정리
    https://www.iss.europa.eu/publications/briefs/technical-political-when-cloud-certification-scheme-divides-europe
  • NYT 칼럼 내용(재게시/인용문 기반 확인 가능 출처): Europe Is in Decline. Good.
    https://english.aawsat.com/opinion/5220680-europe-decline-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