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정치

EU의 '원 마켓(One Market)' 대전환: 강화된 협력이 가져올 2026년 유럽의 미래

 

과거 유럽연합(EU)은 언제나 '하나의 대오'로 움직이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왔다. 27개국이 모두 동의할 때까지 기다리는 '만장일치'의 정신은 민주적이었지만, 동시에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패권 전쟁 속에서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26년 2월, 벨기에 빌전(Bilzen)의 알덴 비젠(Alden Biesen)에서 열린 비공식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이러한 흐름에 거대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제 EU는 더 이상 모든 국가가 함께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른바 '강화된 협력(Enhanced Cooperation)'이라는 카드를 통해 속도전에 돌입한 것이다.

 

 

 

 

 

EU의 '원 마켓(One Market)' 대전환

 

 

 


'하나의 유럽, 하나의 시장'을 향한 절박한 질주

안토니우 코스타(António Costa) 유럽이사회 상임의장은 이번 회의가 "유럽의 번영을 촉진하고 고품질 일자리를 창출하며, 경제적 생존 능력을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 브레인스토밍의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현재 유럽이 느끼는 위기감은 실체적이다. 미국의 성장률이 2%, 중국이 8%를 기록할 때 EU는 단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격차를 줄이지 못하면 유럽은 글로벌 무대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가 지배적이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 총리는 최근의 견해차를 뒤로하고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 추진에 한목소리를 냈다. 메르츠 총리는 "유럽은 경쟁력이 있을 때만 자립할 수 있다"며, 관료주의 타파와 시장 통합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강화된 협력'의 전면 등장이다. 이는 27개국 전체가 합의하지 못하더라도, 최소 9개국 이상의 국가가 먼저 뜻을 모아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분열의 씨앗으로 여겨져 금기시되던 이 방식이 이제는 정체된 유럽을 깨우는 '강력한 자극제'로 부상했다.

 

 

 

 

 


2027년 목표: 'EU Inc'와 저축투자연맹의 완성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제시한 2026-2027 로드맵의 핵심은 '저축투자연맹(Savings and Investment Union)'과 '제28의 체제(28th Regime)'다. 유럽인들의 방대한 저축을 기업 투자로 연결하는 자본 시장 통합은 지난 10년 넘게 공전해왔다. 하지만 폰데어라이엔은 오는 6월까지 1단계 통합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 뜻이 맞는 국가들끼리만 먼저 시작하는 '강화된 협력'을 도입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동시에 'EU Inc'로 불리는 새로운 기업 법인 등록 시스템도 추진된다. 이는 어느 국가에서든 48시간 이내에 디지털로 법인을 설립하고, 27개국 전역에서 단일 법규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혁신적인 방안이다. 이러한 제도적 통합은 복잡한 국가별 규제에 가로막혀 있던 스타트업과 강소기업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으로 기대된다. 목표 시점은 2027년 말이다. 유럽 전체를 단일한 비즈니스 환경으로 재편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에너지 가격 하락과 'Buy European' 전략의 부상

이번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4대 핵심 분야 중 가장 민감한 대목은 에너지와 무역이다. 유럽은 높은 에너지 비용으로 인해 산업 경쟁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탄소배출권 거래제(ETS)를 재검토해서라도 전기 요금을 낮춰야 한다는 실용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맞서 마크롱 대통령이 강력히 주장해 온 '유럽산 우선 구매(Buy European)' 정책에 대한 지지세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물론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여전히 전략적 투자 재원 마련 방식과 단일 시장 심화 정도를 두고 이견이 존재한다. 일부 소국들은 대국 주도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소외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정상회의 전 일부 지도자들이 제외된 사전 세션이 열리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이끄는 독일이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정부와 손잡고 규제 완화에 박차를 가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적 역학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론: 2026년, 유럽은 '말'에서 '행동'으로 옮겨갈 것인가

안토니우 코스타 의장은 "2026년, 유럽은 성과를 낼 것"이라고 단언했다. 작년이 국방의 해였다면, 올해는 경쟁력의 해라는 선언이다. 오는 3월 정기 정상회의에서는 구체적인 타임라인과 목표 수치가 담긴 '원 마켓 로드맵'이 발표될 예정이다. 만장일치의 미덕을 포기하고 '강화된 협력'이라는 실리를 택한 EU의 선택이 과연 유럽 경제의 엔진을 다시 돌릴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때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특정 국가들이 먼저 앞서 나가는 '다속도 유럽(Two-speed Europe)'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지지부진했던 통합의 속도를 높이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2026년은 유럽이 거대한 관료 조직의 이미지를 벗고, 기민한 경제 블록으로 재탄생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