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공포는 단순히 외부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수십 년간 의지해온 동맹과 자원, 그리고 경제적 파트너십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는 불확실성이다.
최근 '내셔널 인터레스트(The National Interest)'는 유럽이 국방, 경제, 에너지 분야에서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파트너십을 다변화하고 러시아, 중국, 그리고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해지는 미국에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NATO의 초대 사무총장 이즈메이 경은 NATO의 목적을 "러시아인은 밖으로(Out), 미국인은 안으로(In), 독일인은 아래로(Down)"라고 정의했지만, 이제 그 공식은 유효하지 않다. 2026년 현재, 유럽은 건국 이래 본 적 없는 거대한 지정학적 위협 속에 놓여 있다.

러시아로부터의 해방, 그러나 미국이라는 새로운 족쇄
유럽은 지난 3년 동안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췄다. EU는 2027년 말까지 모든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할 계획이다. 한때 에너지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우려되었으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의 대량 유입과 운 좋게 이어진 온화한 겨울 덕분에 최악의 고비는 넘겼다. 겉으로 보기에 러시아 에너지 수출 차단은 대서양 양안 모두에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제 유럽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도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덴마크의 주권인 그린란드 영토 할양을 요구하는가 하면, 유럽 국가들에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하고 청정 에너지 공약을 포기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현재 유럽 에너지 수요의 57%를 차지하는 미국산 LNG는 이제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유럽의 목을 조이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작년 체결한 2,500억 달러 규모의 가스 및 원자력 기술 도입 계약이 과연 유럽의 안전을 보장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추가 관세와 영토 요구를 위한 볼모가 될 것인가? 유럽은 에너지 수입을 위해 미국이라는 '강압적인 이웃'에게 의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은 실현 가능한가
이러한 지정학적 순간을 헤쳐나가기 위해 유럽은 이른바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워싱턴이 집단 방위 조항인 NATO 5조에 대해 흔들리는 태도를 보이자, 유럽은 뒤늦게 독자적인 방위 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략적 공중 수송이나 공중 급유와 같은 핵심 군사 역량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이 열매를 맺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유럽 지도부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 등은 유럽의 무력함에 분노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이들은 지경학적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 인도와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남미 공동시장(MERCOSUR)과의 합의를 서두르고 있다. 심지어 캐나다처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미국이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유럽을 새로운 파트너 탐색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중국이라는 헤지(Hedge)와 그에 따른 위험 요소
중국과의 유대 강화는 양날의 검이다. 유럽은 이미 청정 에너지 전환을 위해 중국산 태양광 패널과 핵심 기술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중국의 제조업 지배력은 유럽의 핵심 산업인 자동차 부문과 전반적인 산업 역량을 잠식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중국에 너무 깊이 발을 들였다가는 유럽의 정치적 지지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미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유럽 경제의 근간을 파괴할 수 있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도 있다.
미국에 맞설 유럽의 카드는 무엇인가
변덕스러운 미국의 의사결정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분석가들은 강력한 맞불 작전을 제안한다. 유럽 내 미군 기지 유지 비용을 인상하거나 사용을 어렵게 만드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군 철수의 완벽한 구실을 제공할 뿐이며, 결국 러시아에 대한 안보 취약성만 키울 위험이 크다.
미군 항공기의 유럽 내 급유를 거부하거나 영공 통과를 제한하는 초강수도 거론되지만, 이는 그린란드 분쟁이 실제 군사적 위협으로 번지는 최악의 상황에서나 고려될 만한 도박이다.
결국 유럽은 번영과 영토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지정학적 삼중고(러시아, 미국, 중국)에 갇혔다. 과거 러시아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함으로써 스스로 선택지를 좁힌 결과라는 냉소적인 비판도 존재한다. "신이 누구를 벌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그의 이성을 앗아간다"는 격언처럼, 현재 유럽 정치인들이 겪는 굴욕적인 처지는 스스로 초래한 측면이 크다는 지적이다.
결론: 유럽의 선택과 향후 전망
유럽이 이 격변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에너지 수입처인 미국에 순응하면서도, 중장기적으로는 재생 에너지 기반의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하는 정교한 이중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방위비 증강을 통해 '안보 구걸'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유럽 전역에서 고조되는 분노와 위기감이 실질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질지, 아니면 단순한 외교적 수사에 그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확실한 것은 유럽이 더 이상 미국의 무조건적인 보호 아래 평화를 누리던 '벨 에포크'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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